녹우당 안채

안채는 현재 고산의 14대 종손이 거처하고 있으며 원래 ‘ㄷ’자형 집에 사랑채를 덧붙인 독특한 ‘ㅁ’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건물은 서쪽으로 중앙에 3칸 대청을 두고 좌쪾우 아래로 방과 부엌, 창고 등을 적절히 배치하고 있다.
안채에서 특징적인 것은 안방의 아래쪽 부엌과 건너방 부엌 상부에 설치한 솟을 지붕 형태의 환기용 구조물이다. 안채의 마당 가운데에는 작은 굴뚝과 함께 여러 가지 화초가 심어져 있는 화단이 만들어져 있어 안채의 좁은 공간속에서도 자연을 직접 느낄 수 있게 하고 있다.
고산선생의 연보(年譜)
쪾1587년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漢城府 東部 蓮花坊)에서 태어남
쪾6세 학문(學問)시작
쪾8세 큰집으로 양자가심(한성부 남부 명례방종현 소재)
쪾26세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합격
쪾30세 12월 집권파(執權派)의 전권란정(專權亂政)을 상소(丙辰上疏)하다
31세 1월 함경도 경원(咸鏡道 慶源)으로 귀양
쪾37세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귀양에서 풀림
쪾42세 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장원 급제
쪾42세 3월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 사부가 됨
쪾50세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일어남
쪾51세 2월 보길도 입도(入島)
쪾52세 6월 경상도 영덕(慶尙道 盈德)으로 귀양감
쪾53세 2월 귀양풀림
쪾56세 해남 금쇄동(海南 金鎖洞)에서 산중신곡(山中新曲) 19수 지음
(오우가 6수 포함)
쪾65세 완도 보길도 부용동(甫吉島 芙蓉洞)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 지음
쪾66세 8월 예조참의(禮曹參議)
쪾74세 6월 함경도 삼수(咸鏡道 三水)로 귀양감
쪾81세 7월 귀양풀림
쪾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甫吉島 芙蓉洞 樂書齋)에서
85세로 세상을 뜨시고 이해 9월 22일 해남군 현산면 문소동 금쇄산성하
(海南郡 縣山面 聞簫洞 金鎖山城下)에 묻힘
쪾1675년 숙종(肅宗1) 2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쪾1679년 숙종(肅宗5) 8월 충헌(忠憲:危身奉上日忠, 博文多 能日憲)의 시호 (諡號)가 내려짐
고산윤선도 유적지 오시는길
서해안 고속도로 이용
서서울IC 쮌 목포(4시간) 쮌 영산강방조제
금호방조제 쮌 산이면 쮌 해남읍 (5시간 소요)
서서울IC 쮌 목포 쮌 영암 쮌 독천 쮌 해남읍 (5시간 소요)
경부 호남고속도로
양재IC 쮌 광산IC(4시간) 쮌 나주 쮌 영암 쮌 해남(5시간 소요)
KTX
서울쮌 목포 : 1일 5회 왕복(2시간 58분 소요)
고속버스 이용
서울 쮌 해남 1일 7회 왕복 (5시간 30분)
서울 쮌 목포 1일 24회 왕복(4시간 30분)
부산 쮌 해남 1일 4회 왕복 (5시간 20분)
광주 쮌 해남 직통 06:00~20:30(1시간 20분)
목포 쮌 해남 첫차 05:30~21:00(50분)
고산유물관
한양절충식 철근 콘크리트구조로 대지면적 2,258㎡에 건축면적 지상 297.51㎡, 지하 79.38㎡ 이다. 1990년 12월에 준공 1991년 3월에 개관하여 공재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윤고산 수적관계문서(보물 제482호), 지정14년 노비문권(보물 제483호)등 유물 4,600여점을 전시 관리하고 있다.
고산사당
고산 사당은 영조 3년(1727년)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모셔지고 있다. 불천지위는 4대조를 모시고 묘로 가는 대신 영구히 사당에서 모실 수 있게 하고 있는데 보통 국가에서 공이 인정될 때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이다.
매년 음력 6월 11일 이곳에서 고산에 대한 기제사를 지낸다.
어초은 사당
어초은 사당은 묘 아래에 있으며 매년 음력 11월 15일 이 사당에서 시제사를 지낸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 건물로 전면 반칸 폭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추원당
고산의 14대 종손의 조부인 윤정현(1882~1950)이 1935년 발의하여 어초은 재각인 추원당을 건립하였으며 이 곳 추원당에서는 제관과 참배하는 후손들이 숙식을 하며 문중회의를 한다.
백련지와 소나무 숲
‘흰 연꽃이 피는 마을’이라고 하여 백련동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연지는 연못을 파고 나온 흙으로 동산을 마음심(心) 형태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성리학적 이상향을 추구하고자 했던 어초은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연지 가운데 섬에 정자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녹우당 원림에서도 핵심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어초은 윤효정의 묘
어초은 윤효정은 이곳 녹우당에 처음 터를 잡아 어초은공파의 파조(派祖)가 되며 해남윤씨가 이후 번창하게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묘역은 녹우당 뒤편 적송이 우거진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어초은은 특히 적선을 맞이하여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라는 이름을 남겼다.
비자나무숲 (천연기념물 제 241호)
녹우당 뒷산인 덕음산 중턱에 500여년된 400여그루의 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비자나무 숲은 어초은이“뒷산의 바위가 보이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을 남기자 후손들이 나무를 심고 보호한 이 숲은, 인공 숲으로 문화적, 생태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1972년 7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사랑채
효종이 세자시절 사부였던 고산을 흠모하여 수원에 사랑채를 지어 하사한 것을 1668년 지금의 장소로 이축하였다.
가묘
녹우당에는 3곳의 사당이 있다. 집안의 동쪽에 4대조를 받드는 안사당(家廟)이 있고 집 바깥에 어초은 사당과 고산사당이 있다.
안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맛배집으로 순종 21년(1821)에 세웠다. 4대조(高祖)까지 방안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솟을대문
녹우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솟을 대문의 좌우로 행랑채가 ‘ㄱ’자 형과 우측 아래쪽에 건립된 ‘ㅡ’자형의 2채가 있다.
어부사시사 시비
한국문인협회가 건립한
고산의 어부사시사 시비
녹우당(綠雨堂)
공재 윤두서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 이서의 글씨다. 녹우당의 당호가 유래된 것은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정관(靜觀)
선비는 조용히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의 세계를 살펴 고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운업(芸業)
‘운’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고 ,‘업’은 일이나 직업, 학문, 기예의 뜻을 지니고 있어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어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
한시(無題)
졸재 윤행(拙齋 尹行)의 11대손인
나산(懶山, 윤성호, 자는 도원)이 쓴 글로
알려지고 있으며 어초은 윤효정의 은덕을
나타내는 뜻을 담고 있다.
蓮生此地一根連 (연은 이 땅에서 나서 한 뿌리로 이어지는데)
幾到春風花樹前(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자손들이 많네)
松柏在山魚在沼(산에는 소나무 잣나무가 무성하며 연못에는 물고기가 놀고)
漁樵古蹟 盡然然(어초은 옛 터전 다 그대로 끝없이 이어 가리)
壬子花和會懶山稿(임자년 꽃피는 날에 모여 나산 쓰다)
고산 윤선도 유물
고산 윤선도 수적관계문서
(手蹟關係文書)
보물 제482호
고산의 수적(手蹟)과 고산에 관계되는 문헌을 일괄 지정한 것이다.
산중신곡 (山中新曲)
보물 제482호
고산선생이 1642년(인조 20년)56세에 지은 친필가첩(親筆歌帖). 여기에는 그의 시가문학중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오우가(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 등 시조 19수가 실려있다.
금쇄동기 (金鎖洞記)
보물 제482호
1640년(인조 18년)고산 윤선도 선생이 은거생활했던 금쇄동(해남군 현산면 구시리)에서 지은 작품이다.(한문 수필집)
고산 양자 예조입안문서
보물 제482호
고산선생이 해남 윤씨의 대종을 잇기 위해 8세때 큰집으로 양자 입계된 후 1602년 6월 2일 16세때 예조에서 입안을 해준 문서로 지금의 공증(公證)과 같다. 이 문서에는 예조판서를 비롯 관련 보조자의 수결(手決)이 되어 있어 그 당시 모든 문서에 수결제도가 있었음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고산선생이 1651년(효종2년) 65세에 지은 시조 작품.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10수씩 전체 40수로 되어 있으며, 완도 보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은사첩 (恩賜帖)
보물 제482호
왕이나 왕비등이 고산선생에게 물품을 하사할 때 보낸 물목기(物目記) 89점을 2권 (건(乾)41점, 곤(坤)48점)으로 제책해 놓은 소첩이다.
노비문권 (奴婢文券)
보물 제483호
고산선생의 8대조 광전(光琠)이 지정 14년(1354, 고려 공민왕 3) 아들에게 노비를 허여하는 문서로서 고려때의 개인의 노비문서로는 우리나라에 단 하나 남아 있는 문서다. 탐진감무(지금의 강진군수)가 상급관청에 상신한 것이다.
(고려때 사찰노비는 많이 남아 있음)
고산선생이 66세 때
예조참의 임명장 교지
숙종5년(1679) 8월 고산의
충헌(忠憲) 시호 교지
오우가
고산 윤 선 도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水
구름빛이 맑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은도다
맑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石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둣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음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松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소나무야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지하의 뿌리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竹
나무도 아닌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月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치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산중신곡은 1642년 인조 20년 (고산 56세)
금쇄동에서 지은 작품이며 그 중 오우가
(6수)를 수록
산중신곡(山中新曲)의 산실
금쇄동 (金鎖洞)겧?撚?(聞簫洞)?수정동 (水晶洞)
고산 윤선도의 대표적인 산중신곡(山中新曲)의 무대이다.
여기에서 약 9년간 은거생활하면서 산중신곡 19수, 속산중신곡 2수, 그리고 기타 5수 등 모두 26수의 시가를 지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금쇄동은 경상도 영덕에서 해배된 후에 고산이 찾은 세번째 은거처이다.
첫번째가 수정동이고, 두번째가 문소동이다. 고산은 금쇄석궤를(金鎖錫櫃)얻는 꿈을 꾸고 나서 금쇄동을 발견하는데, 이곳에 회심당, 불훤료, 양몽와, 교의재 등 건물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던 곳이다. 이런면에서 금쇄동은 보길도의 부용동에 견줄 수 있는 고산의 문학적 산실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고산은 금쇄동기(金鎖洞記)에서 22개의 지명 모두에다 그에 합당한 의미 부여와 함께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금쇄동에 전개된 순수자연을 심미의 대상으로 멀리서 관망(觀望)하고 관조(觀照)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순수자연을 그대로 놔둔 채 관념(觀念)으로 조형자연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산 신도비
고산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1679년 미수 허목이 비문을
짓고 1718년 4대손 윤덕희가 세웠으며 높이는 3.5m이다.
공재 윤두서 유물
공재 윤두서(1668~1715) 선생은 고산의 증손자로 서예, 회화등에 능하시고 천문지리학, 금석학(金石學), 병가서에 식견이 넓었다. 조선중엽의 유명 화가(畵家) 삼재(三齋), [공재(恭齋), 겸재(謙齋),현재(玄齋)]중의 한분으로 국보 제240호인 자화상을 비롯 조선지도와 일본지도, 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書帖)등을 남겼으며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다.공재자화상 (恭齋自畵像)
국보 제240호
방성도 (方星圖)
공재 윤두서 선생이 사용한 천문에
관한 책
백마도 (白馬圖) 보물 제481호
공재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말이 비대하면서도 단단하게 묘사되고 정지된 상태에서 뒷다리를 살짝 들어올리는 조그만 변화를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동국여지도 (東國輿地圖)
보물 제481호
공재 윤두서 선생이 그린 조선후기(1710년)의 우리나라 지도이다.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대동여지도」(1860)보다 151년이나 앞선 지도이다.
(후손들이 잦은 국난으로 부터 지도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다가 늦게 세상에 알려짐)
일본여도 (日本與圖) 보물 제481호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에 공재 윤두서 선생이 48명의 첩자를 일본에 보내 일본의 지형과 거리는 물론, 각 지방 부호들의 집까지도 상세히 파악해 표시하고 있다.
나물캐는 두여인 (採艾圖)
보물 제481호
민속화로서 봄나물을 캐는 두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서민아낙들의 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두사람 중 한 여인은 쑥을 찾느라고 고개를 사방으로 돌아보고 있고, 한여인은 허리를 구부리고 방금 찾아낸 쑥을 캐려고 움직이고 있다.
선차도(旋車圖) 보물 제481호
공재의 풍속화 중에 하나로 두인물이 선차를 이용하여 목기를 깍고 있는 모습으로 배경의 표현은 없고, 인물과 목기를 깍는 용구만 화면하단에 집약 시켜 놓고 있는 서민생활을 표현한 조선후기 풍속화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낙서 윤덕희
駱西 尹德熙 1685~1766
본관 해남, 자-경백(敬伯), 호-낙서(駱西), 연옹(蓮翁),윤두서의 아들로 화업을 계승하고 아버지의 화재를 그대로 이어받아 전통적이며 중국적인 소재의 도석인물(道釋人物)과 산수인물, 말 등을 잘 그렸다.
송월롱현도(松月弄絃圖)
청고 윤 용
靑皐 尹 1708~1740
청고 윤용은 공재 윤두서의 손자이다. 수하필서도(樹下筆書圖), 홍각춘망도(紅閣春望圖)등의 작품을 남기고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화풍은 할아버지 윤두서와 아버지 윤덕희의 화법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이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독자적인 화풍을 이룰 충분한 여유가 없었던 듯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기지는 못하였다.
미인도 (美人圖)
청고 윤용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미인도는 큰 트레머리관을 양손으로 매만지는 모습으로 훗날 혜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와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재 윤두서 고택
조선후기의 선비 화가인 공재 윤두서(1668~1715)선생의 고택이다 .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 소재한다.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로 일컬어지며,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다.
윤선도가 풍수지리상 명당터에 이 집을 지었으나 바닷바람이 심해 다른곳으로 옮기고 증손인 윤두서가 살게 되었다고 한다.
ㄷ자형 안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 지붕집이고, 동쪽 광의 남측 지붕은 앞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 지붕이며, 바닷바람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화벽과 판자벽을 조성하였다. 문인화가의 옛집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 수법이 잘 남아있는 유서깊은 전통주택이며, 인근 마을에 해남 윤씨의 기와집들이 잘 보존돼 있어 더욱 옛스러운 정취를 풍기고 있다.
어부사시사
고산 윤선도
봄노래
앞개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의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여름노래
궂은 비 멈춰 가고 시냇물이 맑아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 메니 깊은 흥이 절로 난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산수의 경개를 그 누가 그려 낸고
가을노래
물외에 좋은 일이 어부생애 아니던가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옹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사철 흥취 한가지나 가을 강이 제일 좋아
겨울노래
구름 걷은 후에 햇볕이 두터웠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가 막혔으니 바다만은 여전하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한 없는 물결이 깁을 편 듯 고요하다
쪾어부사시사는 1651년 효종 2년 (고산 65세)에 완도 보길도에서 지은 작품이며
봄 10수, 여름 10수, 가을 10수, 겨울 10수 중 각 첫 수를 골라 수록
보길도 세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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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洗然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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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조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기발한 착상이 잘 나타난다. 개울에 보를(판석보, 일명 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세연지는 산중에 은둔하는 선비의 원림으로서 화려하고 규모가 크다. 어부사시사는 주로 이곳에서 창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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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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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연정(洗然亭) 그림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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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석보(板石洑·굴뚝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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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조원 유적중 유일한 석조보로 세연지의 저수위 조절을 위해 만들었다. 평소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이 일정량을 유지하도록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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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재(樂書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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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집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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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당 옆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낙서재와 무민당 사이에 동와(東窩)와 西窩의 각한칸집을 지었다. 낙서재 뒷편에 소은병(小隱屛)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고산 윤선도는 엄동설한에도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 가는방법 청별선착장에서 10분,도보 40분,자전거 20분 민박 및 먹거리 세연정 쪽 식당 숙박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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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서재 명당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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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수당(曲水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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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의 자제 학관이 기거했던 곳이다. (도보 청별선착장에서 50분,차량소요시간 1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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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방법 청별선착장에서 10분,도보 37분,자전거 20분 민박 및 먹거리 동천석실민박 동천석실(洞天石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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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이라는 뜻은 산천이 두루 경치 좋은 곳이란 의미도 되고, 신선이 사는 곳도 되며, 하늘로 통한다는 뜻도 된다. 석실은 석조로 된 거실임은 물론이지만 산중에 은거하는 방이나 책을 잘 보존해 둔 곳이란 뜻도 된다. 1000여평되는 공간에 석제(石悌)와 석문(石門), 석담(石潭), 석천(石泉), 석폭(石瀑), 석대(石臺) 및 희황교(羲皇僑)유적이 있다. 고산 윤선도는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했다. 그리고 해 저물녘에 차를 끊이는 연기가 선경 처럼 보였다하여 석실모연(石室募烟)이라하고, 부용동 8경이라 했다. 가는방법 청별선착장에서 8분(도보15분,등산)) ,도보 50분(10분등산 제함), 민박 및 먹거리 세연정 쪽 식당 숙박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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